하서 정신 계승 공간
전남 장성에는 하서 김인후 선생이 나고 자란 생가터를 필두로 선생의 숨결과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흔적이 여기저기 있다. 하지만 하서 정신을 기리고 계승 발전하는 공간으로 조선 시대 사액서원이자 대한민국 국가사적,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필암서원을 첫손에 꼽는다. 1590년 필암서원이 건립되었을 때 호남 지역도 사림의 지배체제가 확고해지면서 서원의 건립이 일반화되고 있었다. 1560년~1590년까지 호남 지역 서원 건립 현황을 보면 1564년 김굉필을 모신 순천의 옥천서원과 1570년 조광조를 모신 능주의 죽수서원이 건립되었는데 이곳은 그들이 귀양을 와서 사약을 받은 곳이었다.
1577년에는 이항을 모신 태인의 남고서원, 1578년에는 이언적을 모신 전주 화산서원, 1579년에는 기대승을 모신 광주 월봉서원이 건립되었다. 1590년에는 이후백을 모신 강진의 서봉서원과 하서를 모신 장성 필암서원이 건립되었다. 옥천서원은 건립되고 4년 뒤인 1568년 사액 되었고, 1570년 건립된 죽수서원은 건립되자마자 사액 되었다. 하지만 필암서원은 건립된 지 70여 년이 지난 1662년 사액 되었다. 서원의 건립과 사액 시기는 특정 유학자 제자들과 중앙의 후원 세력의 조직적인 움직임, 출신 지역 유림과 조정과의 관계 등에 의해 좌우되었다.
하서의 학문과 도학 정신 등 학통을 이은 후학들은 조선 후기 붕당정치에서 대체로 서인과 노론의 입장에 동조하는 태도를 취했다. 하서의 사위로 필암서원에 함께 배향되고 있는 양자징을 비롯해 변성온, 기효간과 가사 문학으로 널리 알려진 정철, 소쇄원의 주인이었던 양산보 등이 대표적인 후학들이다. 이들은 영조 이후 노론 주도의 탕평 정국에서 호남 지역의 학문적인 주도권을 강화해 나갔는데, 필암서원이 그 중심 거점이었다. 특히 하서의 문묘 종사는 필암서원이 호남의 여론 진원지이자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확립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1871년(고종 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전국에 47개소의 서원만 남기고 모두 훼철되었을 때, 필암서원이 전남 유일의 서원으로 남게 된 배경 또한 필암서원의 확고한 위상과 역사성에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호남 대표 사액서원
필암서원은 전남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에 있는 서원으로, 호남지방의 유종儒宗으로 추앙받는 하서 김인후(1510~1560) 선생을 주벽으로 배향하고 그의 제자이자 사위인 고암 양자징(1523~1594) 선생을 종향하고 있다. 하서가 세상을 떠난 후 30년이 지난 1590년(선조 23년), 호남의 유림은 선생의 도학을 기리기 위해 그가 살고 공부하며 제자를 가르쳤던 장성읍 기산리에 사당을 짓고 선생의 위패를 모셨다. 이것이 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자 1624년(인조 2년) 황룡면 증산동에 다시 사당을 지었다. 1662년(현종 3년)에는 유생들의 요청에 따라 ‘필암茟巖’이라는 액호를 하사받고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다. 당시 서원의 입지 조건이 수해를 입을 우려가 있었으므로 1672년(현종 13년)에 또다시 지금의 위치로 옮겨왔는데, 임금이 어필御筆로 직접 쓴 편액을 내렸다. 1786년에 양자징 선생도 함께 종향되었다. 그 후 1871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도 훼철되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르렀고, 2019년 7월 ‘한국의 서원’ 9개 서원 중 한 곳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전체적으로 보아 필암서원은 여느 서원과 마찬가지로 교육 공간이 앞에, 제향 공간이 뒤에 놓이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를 보인다. 그리 높지 않은 산이 뒤를 감싼 가운데 평지에 자리 잡은 필암서원 건물은 국가 사적 제242호로 지정되어 있다. 선현에 대한 제사 공간과 교육 및 학문 수련의 공간, 그밖에 장서 공간이나 지원 시설 공간 등 조선 시대 서원의 기본 구조를 모두 갖추고 있는 전형적인 한국의 서원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2019년 7월 6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는 아제르바이잔 수도 바쿠에서 회의를 열고 ‘한국의 서원’ 아홉 곳을 세계유산에 등재하기로 결정했다. 장성 필암서원을 비롯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으로 알려진 영주 소수서원, 안동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경주 옥산서원, 달성 도동서원, 함양 남계서원, 정읍 무성서원, 논산 돈암서원이 한국을 대표하는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으로 국제무대에 선을 보였다. 국내에서는 이미 국가유산 사적으로 지정돼 있던 곳이다.
서원은 조선 시대 핵심 이념인 성리학을 보급하고 구현한 사학교육 기관이다. 서원이 위대한 인물의 정신 위에 세워진 조선의 인문 학당이라는 견해도 있다. 한국의 서원들은 대부분 주변의 경관과 조화를 이루는 특유의 공간 유형과 건축양식을 보유하고 있다. 서원은 역사적으로 제향 의례와 강학 등 본연의 기능을 수행하면서 선비들의 집회와 토론 장소가 되었으며, 서적 간행과 유통의 중심 고리 역할을 하기도 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한국의 서원을 “오늘날까지 교육과 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되고 있는 한국의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자, 성리학 개념이 한국의 여건에 맞게 변화하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가 인정된다”고 높이 평가했다.
세계유산(World Heritage)이란 유네스코가 인류 전체를 위하여 보호되어야 할 보편적 가치가 있다고 인정해 세계유산 일람표에 등재한 문화재를 말한다. 1972년 UNESCO(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 제17차 정기총회에서 채택한 ‘세계 문화 및 자연유산 보호협약’에 따라 구성된 세계유산위원회가 협약가입국의 유산 중에서 인류를 위하여 보호해야 할 가치가 있다고 인정한 것을 세계유산이라고 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문화유산’과 지구의 변천 과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자연유산’, 그리고 이 두 가지의 특징을 합한 ‘복합유산’으로 구분된다.
우리나라의 세계문화유산으로는 종묘(1995), 해인사 장경판전(1995), 불국사·석굴암(1995), 창덕궁(1997), 수원화성(1997), 경주역사유적지구(2000),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2000), 조선 왕릉 40기(2009), 한국의 역사 마을 하회와 양동(2010), 남한산성(2014), 백제 역사유적지구(2015), 통도사·부석사·봉정사·법주사·마곡사·선암사·대흥사 등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2018), 한국의 서원(2019) 등 13곳이 등재돼 있다. 세계자연유산으로는 유일하게 2007년 제주도의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Jeju Volcanic Island and Lava Tubes)이 등재된 바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