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 훈몽제
순창 훈몽제
훈몽재 건립 및 복원

전라도 순창은 장성과 인접하고 있는 지역으로 울산 김씨 가문 집성촌과 선산 등이 자리 잡은 유서 깊은 곳이다. 특히 하서 김인후 선생으로서는 처가 고을이 된다. 부인 여흥 윤씨驪興 尹氏의 친정 마을이 순창에 있어 지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매우 가까운 동네라는 뜻이다. 이런 인연으로 하서는 39세 되던 1548년(명종 3년)에 부모님을 모시고 순창 점암촌으로 이사를 왔다. 둘째 딸 부부인 양자징 내외도 함께 왔다. 그리고 이곳에 초당을 세워 ‘훈몽’이라는 편액을 걸고 강학을 통해 후학 양성을 시작했다. 하서 선생이 훈몽재에 머무른 시기는 1548년부터 부친상을 당하여 장성으로 돌아간 1549년까지 약 2년간이다. 이후 1680년경 하서의 5세 손인 김시서金時瑞(1652~1707)가 원래의 터 인근에 ‘자연당’이라는 이름의 건물을 짓고 기거하며 훈몽재를 중건하여 후학을 양성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퇴락하였다. 140년 후인 1820년경 후손과 유림들에 의해 훈몽재가 점암촌에 다시 복원되었고,1827년 (순조 27년) 순창 유림의 공의公議로 하서 선생과 율곡 이이, 송강 정철, 자연당 김시서의 위패를 모시는 어암서원魚巖書院이 부근에 건립되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었다. 이어서 일제 강점기에 훈몽재가 다시 중건되었으나, 1951년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다.

2005년 전주대학교 박물관의 발굴조사 결과 표토층의 10~20㎝ 아래에서 훈몽재의 옛터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이에 따라 순창군은 하서 선생의 학문적 업적과 정신을 되살리고 후세에 전승·발전시키며, 역사적 가치 재조명과 예절, 유학 등 전통문화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2009.11.9 현재의 위치인 순창군 쌍치면 둔전2길 83에 훈몽재를 중건하였다. 부지 9,950㎡, 건물 6동에 연 면적 785㎡이다. 훈몽재와 부속 건물인 자연당, 양정관, 심연정 등이 자리 잡고 있다. 훈몽재 유지는 2012.11.2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189호로 지정되었다. 동쪽 추령천변에 대학암이라고 새겨진 바위가 있다. 사미인곡의 저자이자 붕당 갈등에서 서인을 이끈 송강 정철이 이곳에서 하서 김인후 선생에게 ≪대학≫을 배웠다는 설화가 전하고 있다.

순창 훈몽제
현재의 건물 배치
훈몽재(강학당)

훈몽재는 하서 김인후 선생이 명종 3년에 순창 점암촌(현재 위치) 백방산자락에 지은 강학당이다. 하서 선생은 주자의 이기이원론을 계승하는 차원에서 성경의 실천을 학문의 목표로 삼아 이를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으로 확립하는데 기여하였다. 송강 정철, 월계 조희문 등 당대 유명한 학자들을 배출하였으며 이곳이 호남 유학의 산실이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자연당(숙박공간)

하서 김인후 선생이 당초 건립했던 훈몽재는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소실되었고 하서 선생 5세 손인 김시서(1652-1707)가 ‘자연당’이라는 이름으로 복원하였다. 하서 선생이 낙향하면서 자신의 자연귀의 사상을 ‘자연가’라는 시를 통해 표현하였는데 김시서가 ‘자연당’을 지어 이를 구현했다고 할 수 있다.

순창 훈몽제
양정관(교육관 및 숙박공간)

매산 홍직필洪直弼(1776-1852)의 ≪훈몽재기訓蒙齋記≫에 수록된 하서 선생의 교육이념인 ‘몽이양정蒙而養正(어리석은 사람을 바르게 기름)’ 에서 따와 ‘양정관’ 이라 하였다. ‘훈몽재 복원사업’을 통해 신축한 교육관으로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한학, 한문, 예절교육 등)과 학술회의 등이 개최되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삼연정(정자)

하서 선생의 문학적 사상인 ‘삼연三然'(산山, 수水, 인人)’ 을 구현한 정자다. 하서 선생이 지은 1,600여 수의 시에 가장 많이 언급된 단어인 삼연에서 그 명칭을 따왔다. 하서 선생의 사위이자 제자인 고암 양자징의 48 영시 중 14번째 ‘원규투류(담장 밖에서 뚫고 가는 물이 흐름을 엿보다)’는 삼연이 잘 드러난 시이다.

대학암(바위)

둔전리 백방산 아래 추령천변에 위치하여 현재도 30여 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의 평평하고 넓은 바위이다. 하서 김인후선생의 문하생이었던 송강 정철(1536-1593)의 친필 ‘대학암’이 암각되어 있는데, 이곳에서 하서 선생이 정철을 비롯한 많은 제자에게 ≪대학≫을 강의했다고 한다. 송강 정철은 훈몽재에서 13세까지 공부했다고 전해진다.

현대적 활용

훈몽재 복원 이후 한학과 인성교육을 가르치는 유학전문 교육반, 방학 예절 교육반 등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 21세기 유학 교육의 산실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했다. 유학 전문 교육반은 한문학과 대학생 등을 대상으로 훈몽재에 거주하면서 논어, 맹자 등 유학 경전을 전문으로 공부하는 과정, 방학 예절 교육반은 초중고생 및 대학생을 대상으로 방학 기간 동안 1~4주 예절 및 인성 교육을 하는 과정, 단기 체험 학습반은 학생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1~2일의 짧은 기간 동안 예절 및 심신 단련을 하는 교육프로그램으로 운영했다. 특히 유학 교육반 마지막 단계에서는 전국 각지의 유학 대가들을 초청해 하서 선생의 가르침과 도학, 절의, 문장의 3대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강회를 개최한 바 있다. 유학문화권 교류 행사로는 2018년에 중국 남창대 및 호남과기학원 교수·학생 35명, 2019년에 중국 강서성 민덕고등학교 교사·학생 38명, 2023년에 중국 남창대 및 북경대 외 7개 대학 교수·학생 36명을 각각 초빙하여 훈몽재와 중국 학교들과의 교류협력 활성화, 한국 문화체험 기회 제공에 앞장섰다. 2020년~2022년은 코로나19로 중지했다.

2019년부터 2023년까지 5년간의 이용 실태 통계를 보면 전체 이용객은 53,498명으로 연수생 365명, 교육생 12,535명 관광객 45,069명이 이곳을 다녀갔다. 교육생의 경우 2019년 한해 만 해도 5,683명을 기록했으나, 코로나19 여파로 2020~2021년에 1,000명대로 뚝 떨어졌다가 2022년 이후 다시 회복세를 보였다. 연수생은 훈몽재에 숙박하면서 유학을 공부하는 학생, 교육생은 당일 코스로 유학을 공부하는 학생으로 구분 운영하고 있다. 현재 류승훈 훈장을 중심으로 ≪소학≫ ≪맹자≫ ≪대학≫ ≪중용≫ 등 유학 교육에 힘쓰고 있다.

(자료 출처 : 순창군 문화관광과)
# 하서 김인후의 자취에서 시작하는 길
문화일보  2023-04-27 자 박경일기자의 여행 – 신록 가득한 전북 순창 두 갈래 길 에서 따온 글
순창의 신록의 수변 길은 추령천 변에 있다. 추령천은 섬진강 댐 상류의 물길로, 내장산 동쪽의 추령봉을 끼고 흐른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추령천이 성주봉과 백방산 사이를 통과하는 구간쯤에 있는 ‘훈몽재’에서 길은 출발한다. 길 이름이 ‘훈몽재, 선비의 길’이다.먼저 훈몽재에 대한 설명부터. 훈몽재는 조선 명종 때, 그러니까 470여 년 전쯤에 하서 김인후가 처가 동네로 이사해서 지은 서당이다. 정조 임금이 ‘동방의 주자’라고 불렀다는 하서 김인후의 호남에서의 학문적 지위는 압도적이다. 하서는 죽고 나서 236년 만에 문묘에 배향됐다. 문묘 배향이야말로 조선 선비의 최고 영예. 하서는 호남에서 유일하게 문묘에 종사된 18 선정(先正) 중의 한 명이다. 지금까지도 그를 두고 ‘호남의 큰선비’라고 칭하는 이유다. 김인후에 대한 당대의 평가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당시 사관들이 명조실록에다 남긴 하서의 인물됨에 대한 기록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사람들은 그의 용모만 바라보고도 이미 속세의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았다.”

김인후가 처가 마을 서당 훈몽재에서 후학을 가르친 건 부친상을 당해 장성으로 떠나기까지 2년에 불과하지만, 훈몽재의 맥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하서가 떠난 뒤에 금세 퇴락한 서당을 130년이 지나서 5대손이 중건했다. 중건한 서당이 다시 퇴락하자 140년 세월이 흐른 뒤에 후손들이 다시 지었다. 이후 서원철폐령으로 다시 쓰러졌다가 일제강점기에 다시 지어졌고, 이번에는 6·25전쟁으로 불타고 말았다. 그러던 것을 순창군이 나서 지난 2009년 말끔하게 다시 지었다. 짓고 스러지기를 자그마치 아홉 번이나 했다는 것만으로도 훈몽재는 특별한 곳이다.

훈몽재에서는 한문학과 대학생에게 유학 경전을 가르치기도 하고 방학 때면 초·중·고생을 대상으로 예절, 인성교육 등을 한다. 관광지라기보다는 교육시설에 가까운 곳이지만, 추령천 물길을 끼고 지어진 훈몽재와 자연당, 삼연정 등의 한옥 건물이 빚어내는 경관이 근사해 여행자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photo전북 순창의 ‘훈몽재 선비의 길’의 목재 덱 구간. 추령천 물길을 끼고 화사한 신록에서 녹음으로 옮아가고 있는 천변의 초록을 따라간다. 이 길이 끝나면 만개한 이팝나무가 늘어선 길이 나온다. 이 길 끝의 정자에 ‘사과정(麝過亭)’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 사향노루 지나간 길에 남은 향기

훈몽재 선비의 길의 거리는 편도 7㎞ 남짓. 출발지점이 훈몽재 아래 추령천 변에 놓은 목재 덱이다. 추령천의 물길을 끼고 덱 로드가 길게 이어지는데, 덱에 올라서서 걸으면 천변의 신록과 봄꽃이 가깝고, 물 건너편으로는 시골 마을의 소박한 전경이 펼쳐진다. 봄의 정취에 온몸을 맡기고 걷는데 버드나무 신록이 눈부신 풍경 사이로 이따금 백로며 왜가리가 날아올랐다. 걷기만 좋은 게 아니다. 나무 덱에는 도시락을 꺼내놓고 먹으면 딱 좋을 만한 휴식공간까지 있다. 이 좋은 길에 인적이 아예 없다. 좋은 길이 더 좋아지게 만드는 건 적막에 가까운 호젓함이다.

훈몽재 선비의 길은 다채롭다. 1.2㎞ 남짓한 덱 로드 구간이 끝나면 황토 포장길로 이어진다. 덱이 끝나는 지점에 새로 지은 작은 정자 사과정(麝過亭)이 있다. 흔하지 않은 한자인 ‘사향노루 사(麝)’ 자에 ‘지날 과(過)’ 자를 쓴다. ‘사향노루가 지나간 정자’란 뜻이다. 김인후가 지은 백련초해(百聯抄解)에 나오는 시 구절 ‘사과춘산초자향(麝過春山草自香·사향노루가 봄 산을 지나니 풀이 절로 향기롭다)’에서 따온 것이다. 지금과 같은 만춘에 딱 어울리는 이름이다. 사향노루가 지나지 않았어도, 이곳의 봄 풍경은 더없이 향기로우니까.

황토 포장길이 끝나면 이팝나무 길이 1㎞ 정도 이어진다. 길가에 탐스럽게 만개한 이팝꽃이 치렁치렁하다. 이팝나무 길을 지나면 길은 하리와 중리 마을로 이어지는데, 가인 김병로 생가터를 거쳐 간다. 초가로 복원한 집이 하서 김인후의 15대손이자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인 김병로 선생의 생가 자리다. 그는 변호사시절 6·10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 등에 앞장선 독립운동가를 무료 변론했고, 신간회 중앙집회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생가는 6·25 때 불타서 사라졌으나 지난 2014년 순창군이 후손의 고증으로 안채와 문간채를 복원했다.

훈몽재 선비의 길의 종점은 김인후를 기리기 위해 후손이 1900년에 바위 낙덕암 위에 지은 정자다. 한옥 양식의 팔각 정자인데 형태와 구조가 독특하다. 을사사화로 순창으로 내려온 김인후는 추령천의 물과 소나무 숲이 어우러지는 낙덕암 일대의 경관을 좋아했는데, 그의 후손인 김병로는 어린 시절 이 정자에서 공부했다고 전한다. 이 길에서 만나는 풍경에도, 사람 자취에도 봄의 향기가 있다. 풍경에서 출발한 길이 이렇게 사람에게서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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