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암서원
서원의 유래

우리의 옛 교육기관에서 향교는 공립학교, 서원은 사립학교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사고가 많은 사람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것 같다. 하지만 서원을 그렇게 단순하게 바라볼 일은 아니다. 서원은 교육과 정치 그리고 사회·경제 등 다방면에 걸쳐 조선의 시대상을 그대로 투영하는 곳으로서 역사·문화적 가치가 크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은 1543년 주세붕이 안향의 고향인 풍기 순흥에 백운동서원을 처음 건립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1550년 이황이 백운동서원을 사액서원으로 요청하면서 서원 보급이 전국적으로 이루어졌다. 조선 초기의 서원은 제사 기능이 생략된 서당과 비슷했다. ≪세종실록≫(1436년)에 “평안도 관찰사가 보고하였는데, 함종현의 강우양이라는 생원이 사사로이 서원을 만들어 학도를 가르친다.”라는 기록이 있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지방 사림들의 사회적 역할이 강화되면서 서원 건립이 많이 증가했다. 명종(1545~1567) 재위 당시 17개였던 것이 선조(1567~1608) 재위 때에는 사액서원만 100개가 넘을 정도였다. 서원이 가장 번성했던 18세기에는 전국에 700여 개의 서원이 건립되었고, 조선 후기에는 같은 성씨들이 한 마을을 이루며 경쟁적으로 서원을 건립하여 서원은 더욱 늘어났다.

서원의 양대 기능은 강학과 향사이다. 하지만 서원 가운데는 강학 기능만 있던 서당이 발전하여 서원으로 변하거나, 향사 기능만 있던 사당이나 사우가 서원으로 변모한 것들도 많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서원의 본래 목적인 강학과 향사 중 강학 기능이 축소되고 심지어는 사묘祀廟만 건립해 서원이라는 명칭을 붙이는 사례도 있었다. 또 향사 기능만 가진 서원은 문중의 권세를 과시하려는 의도로 건립된 경우도 많아 폐단이 적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서원을 중심으로 당쟁이 격화되고 군역의 면제 등 폐단이 나타남에 따라 1741년(영조 17년)에는 상당수의 서원이 철폐되었다. 결국 1871년(고종 8년) 흥선대원군은 학문과 충절이 뛰어난 인물에 대해 1인1원一人一院 이외의 중복으로 건립된 서원을 대상으로 철폐령을 내리고, 전국 47개의 서원을 제외한 수백 개의 서원을 훼철하도록 했다.

서원의 하드웨어

조선의 서원은 기본적으로 전학후묘前學後廟, 전저후고前低後高의 원칙을 준수하여 건물을 배치했다. 하지만 들판이 펼쳐진 평지에 자리 잡은 필암서원은 이런 지형적 특성을 살리지는 못했다. 그래도 전면에 강학 공간이 위치하고 후면에 제향 공간이 들어서 있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원칙은 준수했다. 다만 강당과 동·서재의 배치가 특이하다. 다른 서원은 보통 입구 근처에 동·서재가 있고 그 뒤에 강당이 있는데, 필암서원의 경우 강당이 먼저 있고 그 뒤에 동·서재가 있다. 전학후묘의 양식은 같으나 강당과 사당이 마주 보는 형태도 특이하다.

서원의 소프트웨어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들은 도학 정치를 펼치기 위해 서원이 성균관과 향교 중심의 관학을 대신하여 수기치인의 성리학적 이념을 전파하는 새로운 교육기관으로 자리잡기를 원했다. 따라서 서원의 교육 목표는 인간 심성에 내재한 천명을 실현하여 도덕적 완성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교육기관의 공통 기능이라고 할 수 있는 과거시험 대비 교육 기능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당시 서원의 교육 철학과 교육 내용은 서원규약에 잘 나타나 있는데, 퇴계의 <이산서원 규약>(1558년)과 율곡의 <은병정사 학규>(1578년)에서는 “학문 연구를 근본으로 하고 관리 선발시험인 과거는 부차적인 것”으로 규정했다.

이렇게 서원은 종전의 관학이 과거 공부에 몰두하는 점을 비판하며, 학문과 인격의 완성을 추구하는 명문 사학이라는 명목을 내걸고 본격적으로 설립되었다. 퇴계와 율곡이 주도하던 서원의 원규는 서원이 확산하던 시기에 제정된 것으로서 조선 시대 서원 원규의 모범이 되었다. 퇴계는 “학문을 위주로 하되, 과거에 응시하는 데 필요한 공부는 부수적으로 할 것”을 밝혔다. 하지만 율곡은 “성현의 글이나 성리의 학설이 아니면 서원 안에서 읽을 수 없다(역사서는 읽어도 좋다). 만약 과거 공부를 하고 싶은 자는 반드시 다른 곳에서 해야 한다.”라고 말하며 서원에서는 과거 공부를 일절 금지했다.

또 퇴계는 소학, 근사록, 효경, 대학, 주자대전, 심경을 교과목으로 삼았고, 율곡은 소학,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시경, 서경, 주역, 예기, 춘추, 사기를 교과목으로 삼았다. 이처럼 서원의 교과목은 신유학인 성리학 위주였다. 따라서 서원은 지역사회에서 성리학을 학습하는 공간, 지역 사림의 집결 장소로서 공론을 조성하는 공간, 지방문화의 중심지, 제향 인물에 대한 정기적 의례의 장, 지역사회의 지적·도덕적 통합의 장 등 다양한 기능과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서원의 본래 기능인 교육보다 향사 기능이 강조됨에 따라 경제적으로 많은 특권을 남용하게 되고, 결국 국가 경제를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